광해군 묘(사적363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릉관리소에서 영락교회 묘지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광해군 묘라고 쓴 작은 안내판이 나옵니다.
약 2만평의 광해군 묘는 길가 숲속에 숨어있어 찾는 발길을 어렵게 하며 수백년 동안이나, 지금도 초라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비공개 사적지라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며,이곳을 처음찾는 사람들은 일반집 묘 같은 초라합에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광해군 묘는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과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입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왕위에 올라 재위중 외교 문화 등에 많은 치적을 남겼습니다.
당쟁에 휘말리며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 났습니다.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 19년(1641)67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부인 유씨는 인조반정으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인조 원년(1623) 유배지 강화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묘는 대군의 예에 따라 장사를 지냈기때문에 뒤에 석물이 없고 앞에 비석,상석 망주석 문인석 만 배치되어 있습니다.
광해군과 왕비 문성군 부인 이씨의 묘입니다
정면모습이고 앞에는 낭떠러지 입니다
왕위를 빼앗긴 광해군의 슬픈 시는 현재에도 남아있습니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발치에 묻어달라,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되로 부인 유씨와 나란히 묻힌 조선 15대 왕 광해군 묘소입니다.
비운의 왕 광해군의 비통한심정, 피눈물이 이렇게 비석을 검게 만들었을까? 유독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두 비석만 검게 변해 있습니다.
사관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추덥지근한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는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르 신무 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곡장 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곡장은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서,북 삼면에 둘러 놓은 낮은 담장을 말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 예우를 받으며,도망쳐 숨기에 바빴던 선조와는 달리 귀한 왕세자의 몸으로 전쟁의 복판에 뛰어들어 백성과 전쟁을 경험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선조를 제치고 백성들 사이, 인기만점 떠오르는 스타가 됐습니다 광해군 같은 군주라면 세습왕조의 임금이라도 멋진 통치자라고,
조선 왕 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준은 다르지만 광해군 만큼 매력 있고 멋진 군주다운 군주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그를 복원시켜줄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 봅니다.전직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을 보면서 시사하는 바가 가슴에 와 닫는 나름대로의 역사 속의 생각입니다.
성묘(사적 제365호)
경기도 남양주 진건면송릉리 산55번지
조선14대 선조의 후궁 공빈(1553-1577)김씨의 능입니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양주에 묻혔습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마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610년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했습니다
시효를 공성왕후 라하고 석물을 왕비 릉에 준하게 축수 하였으며 능호를 성릉이라 했습니다.
성릉은 광해군이 폐위 되자 성묘로 강등됩니다. 바로 앞에 풍양 조씨 시조묘인 조맹의 묘가 있습니다.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는 평소의 유언에 따라 공빈김씨 묘는 아들의 묘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잊어진 과거 왕비의 릉이 산속에 숨어 있어 찾아오는 사람없이 홀로 쓸쓸하게 광해군과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낌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의 송릉리 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리에서 유래돠었다고 합니다
성릉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에 지워졌으나 성릉의 흔적이 묻은 지명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성묘 정면 모습
문인석이 울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고 옆에 있는 석마도 슬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망주석
봉분 좌우에 하나씩 있으며 봉분을 찾는다는 표지의 역활을 한다고 합니다.
봉분 우측 모습입니다
봉봍 좌측 모습
곡장서 본 모습입니다
안빈묘(사적제366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1622-1693) 이씨의 묘입니다.
안빈 이씨는 병자호란 후 1637 봉림대군이 심양에 불모로 끌려 갈때 같이 갔다가 1645년 귀국 하였습니다.
효종과 사이에 숙녕옹주를 낳았습니다.
장명등과 문인석상
안빈 묘비
곡장서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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