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사적 제 209호)
단종 왕후 정순왕후의 능 입니다
사릉가는길은 1호선 청량이역 에서 165-3번 뻐스로 가라타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 하차
정순왕후는 (1440-1521)왕비로 책봉되어 단종과 3년동안 부부로서의 함께 살았습니다.
1457년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궁궐에서 쫓겨나
부인으로 강등되었고 그후로는 영영 단종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단종과 생이별을 한뒤 동대문밖 연미정동에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단종이 17세로 죽음을 당한것을 알게된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지금의 청륭사)뒤 산 봉우리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으며 죽을때 까지 단종을 그리워 하였다고 합니다.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으며 평생 소생없이 82세에 세상을 하직 했다고 합니다.
1698년 (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정순왕후도 부인에서 왕후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릉의 정자각 앞에 잔디밭 잔디만 걷어낸다면 수백년 전 박석이 모습을 드러낼것 같이 보입니다.
18세의 어린나이로 자손도 없이 홀로 지낸 송비의 흔적을 사릉주위르 돌아보면서 송비를 그리워 했던 단종은
머나먼 영월에 있고 송비는 이곳에 붇혔으니 죽어서도 두 부부는 서로 만날수 없는 윈명과 인연인가
550 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가 그리워하며, 단종과 송비는 떨어져 있습니다.
정자각
지금도 풀지못한 정순왕후가 흘리는 이 눈물, 비운의 왕비가 흘린 슬픈 눈물은 지금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비각
무슨사연일까? 비각이 닫혀 있습니다.
사릉의 정면 모습
사릉 우측에서 본 모습 입니다
혼유석
정순왕후가 밤마다 나와 동쪽 영월을 향해 눈물을 흘린 자극이 아닌가 합니다
곡장에서 바라본 능침 보습
아래 비각과 정자각이 보입니다
자측모습 석양,문인상 망주석이 보입니다
단종의 장릉과 같은 모양의 석물이 서있고 복위 왕비라 무인석은 없습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 입니다.
석양석도 경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알고 있는지 많이 슬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능침에서 바라본 모습
비각과 정자각 사이로 소나무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어 경치가 매우 좋아 보입니다
능밑에서 바라본 릉상 모습입니다
비각과 정자각 모습,왕후의 슬픈 사연을 알고 있는것 같습니다
능침에 올라가 소나무 숲을 내려다보면 조선 왕릉 중에서 이렇게 소나무가 잘 보존된 숲은 몇곳이 안됨니다.
천계천 영도교에서 18세의 정순왕후는 영뤌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1441-1457)과 에끓는 이별을 하고 살았서는 만날수 없는 길
영월로 떠나며,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자리였던 영도교는 영영 이별한 다리가 되어 애절한 전설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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