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遺産(遺物·遺蹟) 110

왕궁겨울(건청궁 을미사변)24

건청궁 겨울명성황후시해사건   고종이 아버지 홍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 자립하기 위해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건립하다.궁안에 궁인 건청궁은 침전인 곤녕합,옥호루와왕의사랑채인 장안당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곤녕합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이다.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자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 高宗이 앞에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함.) 건청궁  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자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 高宗이 앞에서  칼로 무참히 베었..

왕궁겨울색(신무문)24

신무문 겨울색   청와대와 마주보는 신무문은경복궁북쪽문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 세워진 문이다.신무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 성종 6년(1475)이다. 북악산의 노기를 막기 위해 닫아 두었다가충성을다짐하는회맹제가 있을때만 열었다.왕의비밀행차 등 에 개방한다. 신무문의 현판은 이현직(李顯稷)이 썼다고 전해 내려 온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함께 건립 된것이다..  청와대와 마주보는 신무문은경복궁북쪽문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 세워진 문이다.신무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에서청와대와 북악산 청와대와신무문사이  도로 신무문 담장따라오색단풍이 청와대 정문 신무문현판  세종 15년인 1433년 세워진 문이다.신무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성종 6년(1475)이다. ..

세종대왕기념관궁중혼례원후기(24)

세종대왕기념관 궁중혼례원  홍릉수목원을 도로사이로마주하고있는 세종대왕기념관궁중혼례는 (가례도감의궤)에 있는 가례.왕실 혼인의식으로 그중에서  왕세자와왕세손의 혼인의식을 말한다. 가레는 여섯가지나 되는 절차로 이어진다인력동원을 관장하는 임시기구로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 세종대왕기념관 궁중의례원 고증사료를 통해한국저작권위원회저작권등록및특허청등록으로궁중혼례및중중혼인례를 보급한다세종대왕 기념관정문 세종대왕 기념관 세종대왕 릉에있던 석물들무인석 무인석 궁중혼례는 (가례도감의궤)에있는 가례를 말한다. 왕실 혼인의식으로 그중에서  궁중혼례는 (가례도감의궤)에 있는 가례를 말한다.왕실 혼인의식으로 그중에서  왕세자와왕세손의 혼인의식을 말한다. 궁중가마군들이 체레를기다리는모습 궁중혼례는 (가례도감의궤)에 있는 가례를 말한..

강화초지진탐방후기(24)

강화 초지진  모처럼 강화도 나들이길에 초지대교입구에있는 강화초지진을 찾았다.강화초지진은 조선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적을막기위해 설치한 요새중 한곳이다병자호란 이후 수비체제가강화도중심으로개편되면서경기 서남해안의진(군대주둔지)들이 강화도로옮겨왔다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있던수군기지를효중7년(1658)에 옮겨설치한것이다강화지역은 1870년대통상을요구하며침략한 열강들과결렬이 싸웠던곳이다  초지진성곽입구 주차장 초지진성곽 배치도;토지진입구 병자호란 이후 수비체제가강화도중심으로개편되면서 경기 서남해안의진(군대주둔지)들이 강화도로옮겨왔다 강화초지진은 조선후기서해안으로 침입하는적을막기위해설치한 요새중 한곳이다 성벽멀리 강화초지대교가보인다 성벽을 둘러싼초지진내 병영대포전시장건물 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있던수군기지를 효중7년..

덕수궁일원가을(23)

덕수궁 일원 가을하늘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후손을 비릇 왕족들 저택이 있던곳이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는 이 집들을 임시 거쳐하는 행궁으로 사용했다.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 어가를 옮기면서 경운궁이 되었다. 1897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의 으뜸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세운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되어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꾼다.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은 월산대군의후손을 비릇 왕족들 저택이 있던곳이다. 덕수궁 일원 가을하늘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는 이 집들을 임시로 거쳐하는 행궁으로 사용했다. 덕수궁 광명당 함녕전의 남쪽이며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사이에 있는문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를 설치했다. 1902..

덕수궁돌담길 한바귀 후기 (23)

덕수궁 돌담길둘러보기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구(지번) 주소정동 5-1 (지번) 대한문 정동둘레길 정동은 조선으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역사의 원형이 남아있는 박물관이다. 근대역사 유산과 현대문화가 공존하는서울의 역사문화 명소이다. 이곳은 대한제국 고종의 도시개조사업을 통해 새로 형성된 지역이다. 양이재.영국대사관. 성공회성당.서울시의회.근.현대 서울의모습을 간직한곳이다. 3.1운동.4.19혁명.6월항쟁 등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화역사를 함께한공간이다. 문화재새으로 탄생한 세실마루 세실마루 옥상으로 오르는길은 개방되어 있다 옥상에서 덕수궁일원과 서울시청등 주변을 조망핼본다, 성공회 서을 성당일원 서울시청 일원 덕수궁 정관헌 일원 정동길이정표 영국대사관 영국대사관 쪽에서 덕수궁 가는문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

덕수궁돈덕전 가을(23)

덕수궁 돈덕전 복원 개관 지난 달 9월 새로복원된 덕수궁돈덕전이 정식 개관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1902년~1903년에 지은 서양식 영빈관인 돈덕전이 100년만에 재건되었다. 돈덕전은 고종의 즉위 40주년(1902)기념 칭경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덕수궁 돈덕전 고종은 칭경예식을 국제행사로 성대하게 거행하여 서구열강을 대상으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중립국가 승인을요청할 계획이었다. 이시도는 콜레라 창궐과 러일전쟁의 시작으로실패하고 말았다. 화려한 유럽풍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은 침실이다. 각국의 외교사절의 폐현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활용하였다. 순종의 즉위식과고종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오찬 장소로도 상용하였다. 돈덕전은 고종의승하 이후 덕수궁이 공원화..

덕수궁 가을하늘(23)

덕수궁일원후기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15층에서 내려다본 덕수궁 일원을 담은 이미지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모든 궁궐이 불타자 1593년 선조의 임시 거처로 경운궁 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으나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극복의 중심지 였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환궁으로 규모와 격식을 갖춘다. 그러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1907년 고정의 강제퇴위 이후 규모가 축소된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선황제가 머물면서 덕수궁으로 개명한다. 대한문 대한문앛에서 11시에 수문장교대의식이 있다는 것 일찍 기다리는 관광객들 덕수궁 돌담길로 들어서자 중구청의 청소년 축제가..

조선왕릉(서오릉5 창릉)23

창릉(예종과 안순왕후) 창릉은 조선 제 8대예종과두번째왕비 인순왕후능이며 서오릉의 영역안에 왕릉의 형식으로 처음 조성된 능이다. 정자각쪽에서 능을 바라볼때 왼쪽 언덕에 예종의능 오른쪽에인순왕후의능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열 의경세자가 일찍세상을 떠나자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9세에 세조의 왕위를 받아오위에오른다 왕위에 오른후 남이의 옥사를 수습하였고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반포되지 못하고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는 세자 후궁이있다가 예종이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된다 연산군때 세상을 떠나후 창릉에모셔져졌다 두능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각석을 렀으며 예종능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에 고리모양의 무늬가 있는것이 특이하다 혼유석 혼령이노니는곳 창릉은 조선 제 8대예종과두번째왕비 인순왕후능이며 서오릉의 영역안..

경복궁 가을(건청궁 일원)23

건청궁일원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구(지번) 주소세종로 1-1 (지번) 고종 내외가 아버지인 홍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했다. 궁안에 궁인 건청궁은 침전인 곤녕합,옥호루와왕의사랑채인 장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녕합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이다.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高宗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함.) 궁녀 3명과 왕비 (閔비 시해사건 발생 2년 후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