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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遺産(遺物·遺蹟) 112

고궁의가을(경복궁신무문)21

경복궁 신무문의 가을색 청와대 정문 바로 앞과 마주한 경복궁 신무문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 처음세워진 경복궁 북쪽의 문이다. 신무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인 회맹제 때 이 문을 사용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함께 건립 된 것이다. 북악산의 노기를 막기 위해 늘 닫아 두었다가 회맹제가 있을때만 열었다. 신무문의 현판은 이현직(李顯稷)이 썼다고 전해 내려 온다. 5.16군사 혁명으로 경비사단이 주둔해 비공개후 공개된 경복궁의 북문이다. 20211115 맑음

고궁의가을(경복궁근정전)3

경복궁 정전 근정전 국보제 223호,勤政殿 1395년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지금 건물은 1867년 대원군이 중건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은 다포양식의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경복궁 정전은 중심건물이고 현존하는 건축물 중 높은 수준의 건물이며 국보 제 223호 이다. 정전은 조선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 하던 하던 곳이다. 태조4년 (1395)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고종4년(1867)에 다시 지었다. 경복궁 근정전은 복원사업으로 2000년 부터 진행되온 보수공사로 현재의 모습이다. 20211112 맑음

보신각종

보신각 종 (보물 제 2호) 1985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대 사용되었고 현제 국립박물관 내에 전시 하고 있다. 조선 세조 14년 (1468) 원각사(현재 탑골공원) 걸기위해 만든 종이다.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하면서 보신각 종이라고 한다 201122 흐림

고궁의가을(경북궁신무문)4

경복궁 북문 신무문 가을색 세종 15년인 1433년 처음세워진 경복궁 북쪽의 문이다. 신무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인 회맹제 때 이 문을 사용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함께 건립 된 것이라 한다. 북악산의 노기를 막기 위해 늘 닫아 두었다고 한다. 신무문의 현판은 이현직(李顯稷)이 썼다고 한다. 5.16군사 혁명으로 경비사단이 주둔해 비공개후 공개된 경복궁의 북문이다. 201112 맑음

2017경복궁 근정전과경회루일원가을

2017 경복궁 근정전과경회루일원가을경복궁근정전(국보제 223호,勤政殿)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다포양식의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경복궁의 정전이자 중심건물이고 현존하는 건축물 중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건물이며 국보 제 223호 이다.정전으로 조선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 하던 곳이다.태조4년 (1395)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고종4년(1867)에 대원군이 다시 지었다.2018115 맑음광화문은 경복궁의정문이며 홍예문근정전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다포양식의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경복궁의 정전이자 중심이 되는 건물이고 현존하는 건축물 중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건물이며 국보 제..

신무문과청와대일원 만추

경복궁 신무문과청와대일원 만추 경복궁 북문으로 세종 15년인 1433년 처음세워진 경복궁 북쪽의 문이다.신무문이라 부른것은 성종 6년(1475)이며 이때는 신무문 일원은 인적이 뜸했다.공훈을 기록한 회맹단이 생겨 왕이 공신들의 충성모임인 회맹제 때 문을 사용한다.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함께 건립 된 것이라고 전한다북악산의 노기를 막기 위해 닫아 두었고 현판은 이현직(李顯稷)이 썼다.군사혁명 후 경비사단이 주둔해 비공개로 있다 공개되 경복궁의 북문으로 알린다.20171228 맑음신무문공훈을 기록한 회맹단이 생겨 왕이 공신들의 충성모임인 회맹제 때 문을 사용했다.신무문의 천장 공포이다.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함께 건립 된 것이라고 전한다북악산의 노기를 막기 위해 ..

창덕궁 벽화가있는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둘러보기

창덕궁 벽화가있는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둘러보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왕의 행차나 중오 행사에 의례로 사용되고 신하들은 서쪽에 있는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창건 당시 종묘가 창덕궁 앞에 자리잡고 있어 돈화문은 궁걸의 서쪽편에 놓여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을 건너 정전인 정전인 인정전 일원과 연결된다. 1609년 재건된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아래층은 출입요이고 위층은 감시 전망용으로장대석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보를 걸었으며 익공을 끼웠다. 사용된 것이다. 1920년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금강산만물초승정도는 창덕궁 희정당 대청의 동서 상단을채우고 있다. 전통적 궁중화가 가 주로 공간을 가변성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