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王陵石物)

어머니와아들(광해군묘와성묘)

노을길 2011. 4. 2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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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묘와 성묘

 

광해군 묘(사적363호)

 

광해군 묘는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과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는 찾기가 쉽지않다.

사릉관리소에서  물어물어 영락교회 묘지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광해군 묘라고 쓴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산지  2만평 모퉁이의 광해군 묘는  길가 옆 숲속에 숨어있어 수백년 동안이나, 지금도 초라하게 숨겨져 있다.

비공개 사적지라 이곳을 처음찾는 사람들은 일반집 묘 같은 초라합에  권력무상에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중 외교 문화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쟁에 휘말리며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 났니다.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 19년(1641)67세로 돌아가셨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이곳 남양주로 이장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부인 유씨는 인조반정으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인조 원년(1623) 유배지 강화에서 돌아가셨다.

묘는  대군의 예에 따라 장사를 지냈기때문에 뒤에 석물이 없고 앞에 비석,상석 망주석 문인석 만 배치되어 있다.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유배가면서 남긴 칠언율시 적어놓은 시이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추덥지근한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는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르 신무  나게 보았고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광해군의 비통한 눈물이 비석을 시커멓게 변하게 했나?다른 석물과 달리 광해군과 부인 부인 유씨 두 비석만 이렇게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어 사관은 이렇게 글을 남겼다고한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목사 이시방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위리안치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예로 염비했다고  하자,

주정의 대신들이 모두 그르다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발치에 묻어달라,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되로 부인 유씨와 나란히 묻힌 조선 15대 왕 광해군 묘소입니다.

비운의 왕 광해군의 비통한심정, 피눈물이 이렇게 비석을  검게 만들었을까? 유독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두 비석만 검게 변해 있습니다.

 

 

 

 

성묘(사적 제365호)

 

경기도 남양주 진건면송릉리 산55번지

 성묘는 조선14대 선조의 후궁 공빈(1553-1577)김씨(광해군어머니)의 능이다

 

공빈은 재색이 뛰어나서 선조의 신망과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선조 7년(1574 )에 임해군을,선조8년(1475)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왕의 어머니이기에 건상궁에 모시어 졌을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안치되어 아들인 광해군과의 생전을, 세월의 무상함을 슬퍼할 것이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양주에 묻혔습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마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610년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했습니다

시효를 공성왕후 라하고 석물을 왕비 릉에 준하게 축수 하였으며 능호를 성릉이라 했습니다.

성릉은 광해군이 폐위 되자  성묘로 강등됩니다. 바로 앞에 풍양 조씨 시조묘인 조맹의 묘가 있습니다.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는 평소의 유언에 따라  공빈김씨 묘는 아들의 묘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잊어진 과거 왕비의 릉이 산속에 숨어 있어 찾아오는 사람없이 홀로 쓸쓸하게 광해군과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낌니다.

 

성묘 정면 모습

혼유석 받침대

망주석

석마, 문인석,장명등,혼유석이 보이는 정면 오른쪽 모습

 

성묘가 있는진건읍 송능리라는 지명은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마을이라는 송능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릉이라는 말은 세월이흘러 사람들의 뇌리에서 없어졌으나 성릉의 흔적이 묻은 지명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공빈 김씨의 성묘를 찾아가려면 농촌마을 송능리의 시골길을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기에 광해군 묘보다 찾기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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