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遺産(遺物·遺蹟)

마지막왕손들이 살다간 창덕궁 낙선재(昌德宮樂善齋)

노을길 2013. 12. 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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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昌德宮樂善齋)

 

 

 

 

 청덕궁과창경궁사이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는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 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내에 있는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변 2칸의 단층 팔작 기와지붕에 누 마루가 있는 17칸 반의 규모이다.

장대석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보를 걸었으며 익공을 끼웠다.

누 마루 밑에는  아궁이를 내기 위해 단을 높혔고 아궁이의 벽에는 작은 돌들을 이리저리 붙여 놓았다.

원래 이곳은 상중에 왕후들이 소복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 이은,이방자 비가 이곳에서 서거 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였던 곳이라 단청도 하지 않았다.

 

창덕긍 정문 돈화문

창덕궁의정문인 돈화문

 

황실여인들이 마지막 함께 한 곳

 

순종은 1907년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뒤 창덕궁으로 이사,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1912년 부터는 낙선재에 거주했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 생활하다 1966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환국한 영친와 이은(1897-1970)도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수강재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1912-1989)가 1962년 귀국하여 머물던 곳이며 고종이 환갑에 얻은 귀한 딸이다.

이방자여사도 1963년 귀국 낙선재에 머물러오다 1989년 4월30일 눈을 감았디.

낙선재후원

 

낙선재 황실 마지막여인들이 함께 한 곳 낙선재

 

낙선재 일원

 

덕혜옹주는귀국 후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장,

나는 낙선재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장락문

낙선재로 들어가는 장락문 글씨는 흥성대원군이 썼다고 한다

 

낙선재일원

청덕궁과창경궁사이에 있는 낙선재(樂善)는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 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에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황태자비,이방자여사,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다.

 

낙선재

낙선재는 조선 제24대 헌종(1827-1849)때에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개혁을 실천하기위해 만든 곳이다.

낙선재란 이름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순舜 임금의 고사에서 유래, 선善을 즐거워 한다는 듯을 담고 있다.

 

낙선재 중심건물

근대에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황태자비,이방자여사,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다.

 

석복헌

낙선재 건립 다음해인 1848년(헌종14)에 낙선재 동족에 지은 석북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듯을말한다(왕세자를 탄생)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 생활하다 1966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수강재

 헌종은 석복헌 옆에 수강재도 증수하였는데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인 순원황후의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서이다

 

오래돼된 문

 

수강재마루

세월의 아픔을 말하드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문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 생활하다 1966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마당

 

1963년 환국한 영친와 이은(1897-1970)도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수강재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1912-1989)가 1962년 귀국하여 머물던 곳이며 고종이 환갑에 얻은 귀한 딸이다.

이방자여사도 1963년 귀국 낙선재에 머물러오다 1989년 4월30일 눈을 감았디.

 

장락문

낙선재로 들어가는 장락문

 

낙선재후원

 

낙선재로 들어가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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