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遺産(遺物·遺蹟)

경복궁역사여행(건청궁,乾淸宮)

노을길 2013. 3. 11. 19:54
728x90
반응형

 

경복궁(건청궁, 乾淸宮) 역사)

 

 

 

 

경복궁 증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한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안채(곤녕합)부속건물 (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했다.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불이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긴다.

1885년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 까지 10년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다.

1895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 강점기에 경복궁 건물들이 차레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고 이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다.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돠다가 1998년 철거하고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되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 한다

건청궁정문

 

건청궁 정문일원

 

 

 경복궁 창건(1395) 때부터 있던 왕궁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아서 음료수로 사용하였다한다.

글을새갠 우물두껑은 경복궁 중건(1868) 때 만든것이라고하며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번직각으로 꺽여서 연못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한다.

이것은 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꽃나무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않고 고요히 비치도록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꺽어지는 수로는 둥근 돌로  통로를 ㅁ반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함이라 한다.

 

필성문 건청궁 앞면담에 있는문

 

건청궁일원에서 국립민속박물관방향

 

필성문일원

 

필성문

 

장안당 고종의일상업무 보던곳이기도 하다

 

추수부용루는 물속의 연꽃을 말한다

 

장안당 동쪽 사시향루는 사철향기가 풍긴다는 누각인데 앞쪽에 향원정이 있다.

 

 향원정 일원

 

장안당은 고종임금의처소이다

 

장안당은 임금의편전

 

고종임금 어전

 

 

함광문을 들어서면 바로 곤녕합,옥호루가 나온다

 

 

곤녕합은 건청궁의 안채로 옥호루는 명성황후가 최초로 시해된 곳이다

 

녹금당 곤녕합 남쪽문

 

녹금당은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정시합은곤녕합의 침방이다

 

 정시합은 명성황의 처소, 이곳에서 민비시해사건(일본인 미우라,우법신등에게)이 일어남

 

북행각과 관문각터

 

 

 복수당은 건청궁의 부속건물이다

 

건청궁의 행각

 

 

 

민비의시신이 불태워졌다는 녹산에는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다.

 

자선당은 왕세자및 세자비의 거처로서 자선은 어진성품을 기른다는 뜻이 담겨있다.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에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1916년 자선당을 동경 자신의 자택으로 옮겨 조선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따.

이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따.

이것을 1993년 당시 문화제전문위원 김정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 국내로 둘여왔으나 구조 안전상문제로

동궁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데 제사용 못하고 지금 건청궁 일원이 자라에남게 되었.

 

 

건청궁 배치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