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의 영친왕의 생애와 환국
해방 이후 순종에게 이어 받았던 이왕의 자격이 박탈되고 영친왕은 평민으로 강동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영친왕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주지 않고 일본 역시 국적을 인정하지 않자 무국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0년 4.19로 정권이 교체되어 정부에서는 영친왕에게 돌아오기를 권유 하였다
구황실 사무국과 이은선생 환국추진위원회 등이 나서서 각종 편지보내기와 서명운동을 벌여 그의 환국을 촉구하였다.
영친왕은 강제로 일본에 가게 된지 56년 만인 1963년11월22일에 영친왕비와 함께 영구 환국하게 되었다.
귀국하였을 때 영친왕은 이미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있었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로 1970년 서거 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며 사회활동 등에 힘을 쏟다가 1989년에 서거 하므로써 왕가는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국립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친왕가의 유품들
예복을 착용한 영친와(11세 1907년)
1,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과 영친왕(1911)
2,군복을 착용한 영친왕11세(1907년)
3,예복차림의 영친왕 일행(20세기)
덕수궁 석조전 실내 의자에 앉아있는 영친왕(1911)
좌-우
1,자동차를 타고 있는 영친왕과 다케히토왕,이토히로부미(1910)
2,창덕궁 옥류전에서 영친왕 일행(1911)
3,덕수궁 석조전 실내에서 영친왕 일행(1911)
4,마차를 탄 영친왕 일행(
5,덕수궁 석조전 2층 복도 난간에서 영친왕 일행
6,창경궁 박물관 앞에서 영친완 일행
좌-우
1,영친왕비2세(1902년)
2,영친왕비7세(1907년)
3,영친왕비7세 와 가족들(부모님과 동생 노리고,1907년)
기모노를 입은 영친왕비11세(1911년)
큰 아들 이진을 안고 바라보는 영친왕 부부(1921년)
순종 근현례식 기념사진(1922)
덕혜옹주,영친왕비,윤황후,순종,영친왕,이진
영친왕 부부의 결혼사진(1920년대)
한복차림의 이구(1935년)
영친왕비와 아들 이구(1935년)
영친왕비(1920년대)
말을 탄 영친와과 아들 이구(1930년대)
오사카 유수 사단장 시절 영친왕 가족 사진(1940년대)
좌-우
1,열친왕 부부 유럽 순방시(1927년) 우 2,정원에서 화분을 들고 있는 영친왕 부부(1960년대)
3,중년의 영친왕 부부(1940년대)4,창덕궁 회전당 앞에서의 영친왕 부부와 일행
5,미국에서 영친왕 부부와 며느리 줄리아(1950년대)6,미국에서의 영친왕(1950년대)
군장을 메고 서 있는 영친왕(1910-1920년대)
영친왕과 호칭
영친왕(1897-1970)은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머니는순헌황귀비 엄씨이며 순종의 이북 동생이며 이름은 은이고 아명은 유길이다
고종실록,1900년8월17일에영왕으로 책봉된 기사가 보이고 이후실록에서는영왕과영친왕 호칭이 두루 사용되었다.
천왕이란 호칭에 대해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를 격하 시켜려고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황제국인 중국식 봉호를 따라 대군을 천왕으로 바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따라서 전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영친왕으로 통일하여 포기 하였다.
그러나 황태자 영친왕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왕세자로 격하되고 1926년 순종이 붕어한 뒤 이왕의 지위를 계승 하였다.
1970년 영친왕 서거후 전주 이씨 대동종야원에서는 의민이라는 시호를 올려 의민황태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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