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게가다
500년 조선왕조의 여정을 찾아서
경기도화성시 안녕동187-1번지
건릉(사적제206호)
정조(제22대 효의황후 능이다
영조 (1752-1800)는 즉위하자마자,자신은 사도세자의아들임을 당당하게 알린다.
아버지의영혼을 위로하기위해 아들로써 효를 다했다.
문무를 겸비하던정조는 규장각을 두어학문연구에 힘써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화성을 쌓는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를 막기위해 힘써서며 세로운 국가를화성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도했다.
효의왕후(1753-1821)도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으며,자녀를 두지못하고
6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영조와 같이 이곳에 모셔졌다.
홍살문
창도
정자각
비각
비석
수라간
곡장 좌측모습
곡장에서 본 릉모습
곡장으측에서 본 난간석,석호,석양
우측문인사에서 (옆은 망주석 과 혼유석)
우측에서본(문무인상과석마,장명등.
릉에서본 장자각과 비각
정자각 서편
융릉
경기도 화성시안녕동187-1번지
추존 장조와헌경왕후의능이다.
장조(1735-1762.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면서 노론과마찰을 빚게 되었고,나경언의 고변으로 뒤주에 갇혀 비참한최후를 맞는다.
1762년 영조는28세의 나이에 얼울하게 죽은세자를 슬퍼하면서(세자를 생각하면서 추도한다)
뜻의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사도세자의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존호를장헌으로 올렸고,
1899(광무3년)에 장조로 추존하년서 능호도 융릉으로 높였다.
혜경궁 홍씨(11735-1815)는1744년(영조20)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사도세자가 죽은뒤
혜빈호를 받았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회고록인 (한중록)을 일생에 남겼다.
홍살문 안 창도에서 일본인 관광객에게 해설자가 설명하고 있다.
창도와 정자각
수라간 ; 음식을 준비하던고곳
정자각 동쪽모습.신도와 왕도 계단이 보인다
정자각과 비각 사이에서 본 능침
비각
신도비
장명등,혼유석, 병풍석
릉 우측에서 바라본 문무인석상
곡장에서본 정자각
릉 우측에서본 곡장.망명등,망주석
정자각에서 올려다본 융릉
정자각 서편 모습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며.정조의 마지막 행궁지.
주위에 소나무,굴참나무 등 살림이우거져 여름 나기에는 안성맞춤이라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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